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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표의 행복초대석>패션모델 쇼 전문연출가 신상원 교수
"패션쇼 무대는 창의적인 공간...무엇보다 무대디자인이 중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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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패션모델 쇼 전문연출가 신상원 대경대 모델학과 교수, 그는 500여회가 넘는 패션쇼를 연출했고 제자들은 그를 위해 600회 패션쇼를 준비하고 있다. ⓒ 데일리안 |
신상원 교수(43 대경대학 모델과), 패션모델 쇼 전문연출가다. 그의 직함만으로는 활동 폭을 가늠하기 어렵고 생소하게 들린다.
그는 대구경북에 패션쇼가 전무하던 시절, 20년 동안 전문 모델들과 패션쇼 연출자로서 자리를 지켜 냈다. 연출한 패션쇼만 해도 500여회가 넘는다. 그와 함께 한 모델들은 수천 명에 이른다. 제자들은 스승의 마음을 이어 가자고 600회 패션쇼를 준비했다. 공연 횟수로 치면 그도 환갑(還甲)을 맞는 셈이고 제자들은 수연(晬宴)식을 여는 것이나 같다.
T 자형 패션모델 쇼 연습 무대, 이곳은 신 교수의 600회 패션쇼가 열리는 공연장이다.
터질 듯 한 음악소리가 모델들의 움직임과 시선을 이끈다. 음악의 리듬이 모델들 움직임에 악보가 된다. 170cm 키에 이목구비가 반듯한 20여명의 남녀 모델들이 퇴장 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시간은 불과 20초 이내. 마술과 같다. 모델들의 등장과 퇴장이 마치 속도 전쟁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김새가 다른 만큼, 움직임도 다르고 표정도 다르다. 앞면 대형 거울은 자신만 느낄 수 있는 스승이 되고 친구가 돼 준다. 천장에 매달린 수 십 여개의 조명들은 이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다. 신 교수의 눈이 빠르게 움직인다. 그의 눈빛 방향과 손짓을 따라 모델들은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사인을 주고받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연기자는 감정을 통해 등장인물을 표현해 내야하지만 모델들은 그날 입은 의상을 가장 화려하게 표현해 내야한다. 모델들이 움직이는 속도는 음악리듬에 따라 변하고 감정에는 집중되지 않는다. 무대중앙으로 남녀 모델들이 섞이고 흩어지기를 수십 차례 반복하면서 앙상블을 이뤄 낸다. 모델을 향하는 그의 소리가 음악소리를 넘어선다.
“시선을 더 고정시키고 몸을 더 세워서 움직여봐”, “의상이 더 돋보이게 움직임을 멈추고 포즈를 잡아”, “퇴장하자마자 다른 의상을 준비해야지”, “움직임에 개성을 살리고 관객들이 의상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 연출자 소리 크기에 따라 모델들의 표정과 움직임이 변한다. 모델 한명이 무대아래 객석으로 내려와 한 번에 생수한통을 다 비운다. 음악 소리가 줄어들고 조명이 꺼진다.
모델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패션을 표현해내야 하는 직업
배출해낸 모델만 500명 넘어
대구가 섬유, 패션도시로 중심에 서 있을 때, 신 교수는 다양한 패션쇼를 연출하면서 대구를 알렸고 디자이너들의 패션 흐름을 정확하게 꿰뚫는 연출능력으로 패션쇼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국내외 패션쇼 연출을 하면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디자이너들의 패션쇼를 그가 주도했고, 배출해낸 모델들만도 500여명에 이른다. 한국모델협회에 등록돼 활동 중인 모델들이 5000여명인 것을 감안할 때 그의 손을 거쳐 간 모델들의 숫자는 적지 않다. 이중에는 미스코리아도 있고, 슈퍼모델들도 상당수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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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데일리안 |
“교수님은 대구시와 공동으로 패션뷰티체험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관광객들의 반응이 폭발적입니다.”
“대구는 관광도시가 돼야 합니다. 인프라가 굉장히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대구하면 패션과 미인을 떠올립니다. 도시의 이미지의 맞는 모델들의 활동을 체험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모델들의 개성(個性)과 미(美)의 선택기준으로만 문화적 상품화를 시키겠다는 게 아니라 참여와 체험을 통해 모델 활동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문화상품으로 개발할 것이라고 신 교수는 강조했다.
지금까지 패션뷰티 체험을 이용한 외국인 관광객만 해도 1200명이 넘어 섰고, 내국인도 600명이 될 정도로 반응이 뜨겁다. 1년이 넘어섰지만 당분간 예약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모델체험 프로그램은 우리고유의 전통문화를 접목하고 현대적 감각을 응용한다. 체험이 있는 날이면 휴대전화부터 카메라, 캠코더 등으로 기록을 남기려는 사람이 많아 문화상품이 되고 만다. 관광객은 참여해서 즐겁고 모델들은 표현해서 즐겁다.
패션쇼 연출이 당당하게 직업이 될 수 있도록 그가 해낸 역할은 클 수밖에 없다.
방송 PD를 꿈꾸던 청년시절, 우연한 기회에 이광희 디자이너의 패션쇼를 보고나서 연출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밑바닥 생활부터 출발했다. 당시의 추억은 그에게 스승이 돼 있는지 입을 여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분(이광희 디자이너) 쇼를 보면서 큰 자극을 받았어요. 연극, 영화, 드라마라는 장르도 있었지만 패션쇼도 충분하게 종합예술로서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공무원이나 방송 PD가 되길 바라셨던 부모님을 설득하는게 정말 힘들었죠. 패션쇼는 디자이너의 의상을 표현해야합니다. 연출을 하고 싶다니까 모델들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해요. 그렇다면 모델들이 있는 세계로 가보자고 결심을 한 겁니다.”
그는 결국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모델라인 공채 1기로 들어가 기획연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고생의 연속이었다.
모델에게 밥을 날라다 주는 일부터 온갖 허드렛일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 모델들이 올라선 무대에 천을 깔고 뜯고, 부수고를 수백 번 반복했다. 객지 생활이 쉽지 만은 않았다. 손은 트고 마음은 갈라지고 어깨를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는 고단함으로 밀려왔지만 그는 20년 앞을 내다보고 속으로 울었다.
“쇼가 끝나면 모델들이 신었던 힐 자국이 무대에 그대로 남습니다. 분필로 그 자국을 닦는 일을 했어요. 밑바닥 생활이 저한테는 굉장한 도움이 됐지만 마음속으로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멀쩡하게 양복을 입고서는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후회도 됐습니다. 후회는 했지만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은 없어요. 일에 대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죠. 성취감으로 마음을 달래고 도전정신으로 버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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